:: 경맥53 - 경북 중고 53회 동기회 Vol.2 ::
   
     

제목: 조공무역(朝貢貿易) [조공은 일방적인 공물 상납이 아니었다]
이름: 이인철


등록일: 2007-04-13 10:03
조회수: 684 / 추천수: 64




[이덕일 사랑] 조공무역(朝貢貿易)

입력 : 2007.04.12 22:32 / 수정 : 2007.04.12 22:43

조선과 명(明) 사이의 교역이 조공(朝貢)무역인데, 조선이 일방적으로 명에 진상품을 갖다 바친 것으로 생각하지만 큰 오해이다. 조공사절 횟수를 두고 벌어진 실랑이가 이를 말해준다. 조선은 ‘1년 3사(使)’를 주장한 반면 명은 ‘3년 1사(使)’를 주장했다. 조선은 신년의 하정사(賀正使)를 비롯해 1년에 세 번 가겠다고 주장하는데 명은 3년에 한 번만 오라는 것이다. ‘태조실록’ 2년(1393) 9월조는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주문사(奏聞使) 남재(南在)에게 “3년에 한 번만 조회하라”고 요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도 같은 요구를 한 적이 있었다. 조선의 ‘1년 3사(使)’ 요구는 정종 2년(1400)에야 받아들여졌고, 중종 26년(1531)부터는 동지사(冬至使)가 추가되어 ‘1년 4사’가 되었다.

3년 1사가 명나라의 무기가 된 이유는 조공이 조선에 경제적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조공품보다 명 임금의 사여(賜與)가 많은 것이 원칙이었다. 이런 공무역보다 더 큰 것이 사무역(私貿易)이었다. 조선은 역관(譯官)들에게 별도의 사행비용을 지급하지 않고 인삼 여덟 꾸러미를 판매할 수 있는 팔포(八包)무역권을 주었는데, 이것이 역관들을 조선 제일의 갑부로 만든 원동력이다.

일본과 명 사이의 중계무역도 큰 이익이었다. 명이 직접 교역을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일본은 은을 가지고 동래 왜관에 와서 조선 역관들에게 중국 물품을 사가야 했다. 조선은 일본의 은을 가지고 명에 가서 상품을 매매해 이중의 이익을 남겼다. 임진왜란 때 일본이 명에 강화 조건으로 조공 허락을 요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공무역은 큰 경제적 이득이었으니 명의 ‘3년 1사(使)’가 무기가 되었던 것이다. 명은 화자(火者·거세 남성) 같은 곤란한 진상품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정치적 명분을 얻고 조선은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 방한한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한·중이 손을 잡으면 할 일이 매우 많다(中韓合作 大有可爲)”고 말했다. 지당한 말이지만 진짜 큰일을 하려면 동북공정 같은 역사문제로 도발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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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철
본인은 약 5년간 조선일보의 주요 기사들을 내컴퓨터의 글자료창고 폴더에 스크랩 해 왔었다. 그 중 괜찮다고 생각되는 기사 있으면 바로 홈페이지에다 글올리기를 한다. 수많은 칼럼니스트들이 있다. 본인이 가장 편안하게 읽으면서도 바로 이해가 되고 읽고 나면 뭔가가 남겨진 느낌의 글이 바로 조선일보의 이덕일 사랑이다. 이것은 본인이 그의 글을 함부로 평가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본인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다. 오늘로 223회이며, 이틀에 한 번씩 올리니, 이제 1년 반 정도가 지났다. 역사평론가란 명칭의 직업을 가진 이 분과 같은 글을 쓰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참으로 해박한 역사적 지식과 교양이 베어있는 문체의 글이며, 편안한 글이란 느낌이 다시 한 번 와 닿는다. 역사의 오류를 수정해 오고 있는 이 분의 글이 오래 동안 조선일보 독자들의 사랑을 받기를 바란다.
2007-04-13
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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